[창간특집] 알츠하이머병과 싸우는 사람들: 묵인희 서울대 의과대학 교수 ②

어린이 신문 과학란 즐겨 읽어…서울대 동물학과 진학
결혼 후 미국 유학 애리조나 대학서 뇌과학 공부 시작

기자명 최준석 기자 (jschoi@themedical.kr)

묵인희 교수는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동물학과 82학번이다. 어려서 꿈이 기자였다. 기자가 되어 필봉을 휘둘러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부모님이 소년조선일보를 구독해줬다. 어린이신문의 과학란이 재밌었다. 신문이 배달되기를 기다릴 정도였다.

고등학교 때는 생물 선생님 말이 뇌리에 꽂혔다. 선생님은 식물의 광합성 메커니즘을 설명하면서 우리는 광합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누군가 이걸 밝히면 전 세계의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할 거라고 말했다. 묵인희 학생은 식물학과에 진학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가 고3 때 식물학자가 되겠다고 하자 집에서 반대했다. 그 성적이면 의과대학도 충분하다며 말렸다. 집안의 반대를 뿌리치고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에 들어갔다. 자연대에 들어가서 생각이 바뀌었다. 학문적인 흥미로움에 끌려 동물학과를 선택하기로 했다. 집에서 또 반대했다. “네가 무슨 체력으로 동물원에 가서 동물들이랑 씨름을 할 거냐”라고 했다. 동물학과에 가면 수의사가 되는 걸로 잘못 생각했던 것이다. 묵인희 학생은 “그런 게 아니고 좋은 연구를 해서 학자가 되고 싶다”라고 부모님을 설득했다. 그랬더니 “학자 되는 건 쉽냐”라고 펄펄 뛰셨다.

묵인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사진=오철민]
묵인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사진=오철민]

그는 서울대 동물학과 마지막 졸업 학번이다. 그가 졸업한 이듬해 동물학과는 이름이 분자생물학과로 바뀌었다. 분자생물학과는 나중에 미생물학과 등과 통합해서 오늘날 생명과학부가 되었다. 묵인희 학생은 뇌과학이나 면역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1986년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어바인 캠퍼스로 박사 공부를 하러 갔다. 결혼하자 마다 유학을 떠났고 부군과 함께 어바인 캠퍼스에서 같이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출산을 했다. 학업을 중단했다. 박사과정 학생 두 사람의 월급이 각각 600달러쯤 됐는데, 그 걸로는 생활을 할 수 없었다. 집세 450달러를 내고 남는 돈으로는 극빈 생활을 해야 했다. 생명과학대학의 신경생물학자인 가쓰미 수미카와 교수 연구실 테크니션이 되었다. 연구실에 필요한 시약과 기계를 구매하는 행정과 교수의 연구를 도와주는 게 테크니션이 하는 일이다. 테크니션 월급은 2000달러였다. 그가 생계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자 한국의 친정집에서 난리가 났다. “너 정신이 있냐?”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 대목에서 묵 교수에게 부군이 누구냐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카이스트 생명과학과의 정민환 교수라고 했다. 정민환 교수는 서울대 동물학과 79학번으로, 그의 학과 3년 선배다. 그는 테크니션으로 1991년까지 5년을 일했다. 남편이 박사학위를 받고, 박사후연구원 일자리를 애리조나대학교에서 얻었다. 그는 애리조나대학교 대학원에 등록하고 중단했던 뇌과학 공부를 시작했다. 하바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젊은 연구자이던 허만 고든(Herman Gordon) 교수의 지도를 받는 박사 과정 학생이 되었다. 테크니션으로 5년 일한 게 크게 도움이 되었다. 학위를 3년 반 만에 끝냈다. 묵 교수는 “애리조나대학교에서 최단기 졸업이라는 기록을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부군이 박사후연구원으로 4년간 일하고 1995년 아주대학교 교수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갔다.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묵 교수는 동행하지 않고 미국에 남았다. 박사후연구원 생활을 시작했다. 캘리포니아대학교 샌디에이고 캠퍼스의 알츠하이머병 연구자 쓰나오 사이토 교수 연구실에서 일했다. 이곳에서 알츠하이머병 연구를 시작했다. 박사후연구원 생활 1년이 지났을 때 사이토 교수에게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사이토 교수와 그의 13살 난 딸이 밤에 집 앞에서 총을 맞고 사망했다. 잘 나가던 40대 연구자가 총을 맞고 죽은 건 미국 사회에 파문을 일으켰다. 사건은 미국 신문 뉴욕타임스 1996년 5월 10일자에 ‘알츠하이머병 연구자가 살해된 채 발견되다’라는 제목으로 보도될 정도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와 이혼 소송 중이던 부인과의 갈등이 비극으로 끝난 것이었다.

지도교수가 죽으니 그의 연구실 소속이던 대학원생들과 박사후연구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묵 교수도 새로운 PI(책임연구자, Principal Investigator)를 찾았다.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한국에 있던 부군이 ‘미국에 언제까지 있을 거냐‘라며 귀국을 압박했다. 1996년 9월 묵 교수는 아주대학교 의과대학 신경과에 연구 강사가 되어 귀국했다. 아주대학교 의과대학 최초의 Ph.D. 연구 강사였다. 의대 임상과에는 의학박사(M.D)가 대부분이며 Ph.D.는 거의 없다. 그리고 1년 뒤 교수가 되었다. 묵 교수는 “내가 운이 좋았다”라고 겸손해했다.

묵인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사진=오철민]
묵인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사진=오철민]

2004년 서울대학교 의대로 자리를 옮겼다. 서울대 교수 모집 공고를 냈을 때 지원해 모교에 들어갔다. 서울대 의대에서 더 많은 기회를 잡았다. 의과학과 제3대 학과장으로 일했고(2012-2014), 의사 출신이 아닌 Ph.D.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생화학교실 주임 교수가 되었다. 2015년에는 한림원 정회원이 되었다. 그는 “한림원 정회원이 된 건 자랑스럽다”라고 말했다. 서울대학교 평의원회 위원이기도 하다. 각 대학이 투표를 해서 평의원회 위원을 선출한다. 위원으로 뽑혀서 자랑스럽다고 했다. 여성생명과학포럼 회장으로 일했다. 여성생명과학포럼은 여성생명과학자 모임. 지난해가 창립 20년이었다. 20년을 정리하는 책자도 만들고 향후 20년을 계획하는 행사도 했다. 묵 교수는 “회장으로 일한 게 자랑스럽다”라고 했다.

그는 한국 치매 연구 분야의 리더로 존재감이 우뚝하다. 9년 전 취재하러 만났을 때는 ‘치매 예측 뇌지도 구축 사업’ 참여를 위해 분주했었다. 지금은 역할이 더욱 커졌다. 그가 건네주는 명함에는 치매 관련 직책이 두 개 적혀 있다. ‘치매극복연구개발사업단 사업단장’과 ‘치매융합연구센터 센터장’이다. ‘치매극복 연구개발사업단’은 과학기술부와 보건복지부 사업이다. 연 200억 원이 투입되며, 2020년에 사업이 시작했다. 9년간 1987억을 지원 받아, △치매 원인규명 및 발병기전 연구 △치매 예측 및 진단기술 개발 △치매 예방 및 치료기술 개발을 한다. 한국의 치매 연구자의 상당수가 사업단이 하는 사업에 참여한다. 사업단 사무실은 서울대 의대 함춘관 3층에 있다. 묵 교수를 내가 만난 장소가 사업단 사무실이다.

묵 교수에게 치매 연구 커뮤니티의 리더로서 계속 맹활약하는 비결을 물었다. 그는 웃는 표정을 지으며 “하나밖에 할 줄 몰라 알츠하이머병 연구만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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